묵상한 말씀 : 창세기 9:18~29/10:1~32
1. 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해서 인류가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지는 과정을 족보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 이 세 아들이 백인과 흑인과 황인의 조상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해석들이 난무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9:18 이하의 사건을 통해서 흑인이 백인의 노예가 되는 것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주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9장의 이야기는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표현이 있다면, 함을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만취하여 나체로 자고 있는 장면을 보고 형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사람은 가나안이 아니라 그 아버지 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이 연류 되어 있는듯이 함을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2. 성경에는 곳곳에 많은 여백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그 여백을 본문에 근거한 상상으로 채워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함의 네 아들(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10:6) 중에서도 유독 막내 가나안을 콕 집어 언급한다는 것을 볼 때에, 이 사건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자가 ‘함’뿐만 아니라 함의 막내 아들 ‘가나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노아가 만취해서 나체로 자고 있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자가 손자 가나안이었을 수도 있다. 가나안이 할아버지 천막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아버지 함에게 바로 알렸고, 함도 그것을 목격하고 형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사건이 진행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은 상상할 수 밖에 없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함은 아버지 노아로부터 (형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저주를 받는다.
3. 그리고 10장으로 넘어오면 세 아들의 족보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 6~20절까지가 함의 족보이다. 특히한 것은 노아의 저주와 상관 없이 함의 족보 이야기가 제일 길게 등장한다. 니므롯이라는 큰 용사도 등장하고, 여러 큰 성읍을 건설하면서, 나름 여러 족속과 나라를 이룬다. 우리는 비슷한 패턴을 창세기 4장에서 이미 확인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가인의 후손들이 도시들을 건설하며 더 많은 업적들을 남긴다. 상대적으로 셋의 후손들은 명단만 제시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함의 자손들은 큰 민족을 이루고 번성한다. 야벳의 족보는 가장 짧다(10:2~5). 셈의 족보도 주로 사람만 언급될 뿐이다(10:21~32). 그렇다면 이런 족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야기의 초점이 무엇일까?
4. 이 부분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창세기 뿐만 아니라 ‘모세 오경’이라고 부르는 책들(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여호수아서 이후의 책들까지도 읽어야 한다. 너무 방대한 이야기라 잘못하면 배가 산으로 갈 수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가장 가깝게는 셈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와 연결할 수 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구약의 전체 흐름은 ‘씨’(자손)와 ‘족보’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순종하기 위한 한 사람, 한 가정, 한 민족의 이야기가 구약의 핵심이다. 특히 창세기 1~11장은 하나님의 부름(선택)을 받은 한 사람과 한 가정의 이야기로 달려가기 위한 준비 이야기이다.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서 다시 시작한 인류가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해지는가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 한 가운데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씨’를 통해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도 기록하고 있다.
5.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단순히 스토리(story)나 내러티브(narrative)가 아니다. 성경은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 거대담론)이다. 그리고 그 메타 내러티브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그 분의 일하심이 있다. 예를 들어 구약을 메타 내러티브의 관점으로 읽지 않으면, 개별적인 내러티브에 빠진다. 오늘 말씀으로 보면, 노아의 윤리성 –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라는 평가를 받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나체로 잠을 자는 이야기 – 에 너무 초점을 두게 된다. 하지만 창세기는 그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개인의 이야기이든, 가정이나 민족의 이야기이든, 그것을 통해 어떤 윤리나 삶의 모델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이야기와 사건들 너머 큰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경영, 뜻과 계획, 일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볼 수 있어야 창세기를 바르게 읽어낼 수 있다. 9장의 노아가 술에 취한 사건이나 10장의 노아 아들의 족보 이야기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