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한 말씀 : 창세기 18:1~15
1. 다시 한번 여호와의 방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방문(임재)과 다른 점은 어떤 환상이나 음성, 영광 중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은 세 남자로 방문하셨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세 남자 중에 한 명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다른 두 남자는 천사라는 것이다(3, 10, 13~15절).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그 세 사람을 자신의 천막으로 영접하여 엄청난 음식을 대접했을까? 그냥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손님 접대와 수치의 문화)로 인해 정말 부지 중에(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접한 것일까? 반대로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세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까?
2.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세 사람이 지나가는 중에 아브라함에게 붙들린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오전에 일과를 마치고 제일 뜨거운 낮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장막 문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 셋이 맞은 편(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에 서 있었다(1~2절). 다시 설명하면 멀리서부터 세 남자를 발견하였고, 지나가고 있는 그 나그네들을 붙잡아서 자신의 장막에 쉬게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아브라함의 시야에 세 남자가 나타났고 그들은 마치 아브라함의 영접을 기다리는 것처럼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나그네를 발견한 아브라함은 즉시 달려가 세 남자를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였다는 것이다.
3. 히브리서는 이것을 ‘부지 중’이라고 표현한다. 아마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정확하게 그들의 정체성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면 그 세 남자가 범상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100세가 다 되어가는 아브라함이 몸을 땅에 굽혔다는 것도 그렇고, 세 남자 중에 한 사람에게 “내 주여”(아도나이, my LORD)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다. 어쩌면 그들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서 부지 중에 영접하고 부지 중에 그런 호칭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자신의 집으로 손님을 영접한 아브라함은 엄청난 양의 음식을 준비한다. 고운 가루 세 스아(24리터)와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았는데, 이 양은 엄청난 양이다. 세 사람을 대접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다. 아마 단순히 세 사람만을 위한 음식 준비가 아니라 자신의 대가족 전부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잔치를 준비한 것으로 봐야 한다.
4. 이런 잔치가 준비되고 진행되는 식탁 자리에서 세 남자 중의 한 남자(여호와 하나님)가 다시 한번 이삭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삭의 탄생에 대한 예고는 이미 17장에 한번 있었다. 그렇다면 18장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7장의 초점은 언약(개명, 할례)이다. 언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곧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는 말씀이 주어진다. 18장은 같은 이삭의 출생에 대한 예고를 언급하는데, 앞선 예고보다 더 구체적으로 시기(내년 이맘때)를 언급한다. 임신 기간이 10개월인 것을 감안한다면 곧 사라가 임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자손에 대한 약속이 이제 곧 성취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곧 사라의 태를 열어서 임신하게 할 것이고, 다시 하나님이 방문하실 때에는 이삭을 품에 안고 있을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직접 방문하신 것이다.
5. 이런 하나님의 예고를 사라는 장막 안에서 듣고 있었는데, 그 약속이 너무 터무니 없어 속으로 웃었다(정확히 말하면 비웃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았다. 특히 사라는 이미 생리가 끝난 상태로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또한 12절로 유추해 보면 두 사람은 더 이상 성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사라에겐 더 이상 성적인 즐거움이 없었다). 한 마디로 임신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충분히 속으로 (비)웃을 수 있다. 이것은 17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웃음을 오버랩(overlap)하게 만든다. 어쩌면 아브라함의 웃은 허탈한 웃음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이런 저런 시도들을 다 해 보았지만 되는 것은 없고, 하나님은 계속 아니라고 하시고, 그런데 나이는 이제 너무 들어버린 상황에서 자식에 대한 예고를 하시니 그냥 허탈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6. 사라의 웃음은 비웃음이었다. 사라는 여성으로 이미 생리가 끝났음을 알고 있었고, 임신할 수 있는 확률이 ‘0’ 퍼센트라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것도 시기를 못 박으며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니 (비)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여러 설교자들이 이런 반응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데 구지 그렇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입장에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의 반응에 대해서 하나님도 아무런 책망이나 평가를 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이라는 통로를 통해 일어나지만, 그들의 믿음이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순 없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늘 가지고 있다. 계속 강조하지만 이 본문의 강조점은 인간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다.
7. 14절이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초점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인간이 놓여 있는 상황과 환경에 상관 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며,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의 한 사건을 떠오르게 만든다. 어쩌면 아브라함과 사라보다 더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 놓여져 있던 처녀 마리아를 향하신 천사의 응답이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눅 1:35, 37) 그렇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은 없고, 능하지 못한 일이 없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신다면 이루어지고 성취된다. 인간의 기준으로 아무리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과 환경에 놓여있다하더라도 말이다. 하나님이 일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