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한 말씀 : 창세기 21:22~34
1. ‘그때’라는 것이 정확히 어느 때인지가 불명확하다. 사라가 아비멜렉의 후궁이 될 뻔한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이삭이 젖을 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장의 사건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0장에 등장하는 아비멜렉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비멜렉이 동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며, 20장의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의 위상이 매우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아비멜렉이 자신의 군대장관 비골을 대동해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사라의 문제로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신 것도 그렇고, 아브라함의 기도로 닫혀 있던 태가 열린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상황들을 통해서 아비멜렉의 고백처럼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함께 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복 주시며 힘있게 하시는지를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
2. 그래서 아비멜렉은 자신의 군대 장관을 대동해서 아브라함을 찾아와 협정(언약)을 맺으려고 한다. 이렇게 아비멜렉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브라함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20장에서는 대등한 관계라고 볼 수 없다. 비록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지만, 아비멜렉이 자신의 후궁으로 사라를 데리고 갔다는 것부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더 강한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21장에 와서는 그 관계가 대등해졌다. 이것을 통해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이삭을 낳고 젖을 땐 이후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년 정도 지났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강성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을 목격 하였고,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3. 두 사람은 서로 불가침 조약, 곧 평화 조약을 맺는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조약을 맺으면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후한 선물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보통 평등한 관계에서 조약을 맺을 때는 조약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주고 받는다. 그 선물의 가치가 클수록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예우가 담겨져 있다. 반대로 평등하지 못한 조약을 맺을 때는 약자가 강자에게 선물을 바치기도 하고, 강자가 약자에게 선물을 베풀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분위기는 아브라함이 강자이다. 그것은 아비멜렉이 먼저 찾아왔다는 것에서 알 수 있고, 아브라함이 우물 문제로 아비멜렉을 책망을 하고, 일방적으로 그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암양 새끼 일곱을 통해서 아비멜렉에서 우물을 사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평화 협정에 대한 제안은 아비멜렉 쪽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협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다.
4. 그들은 그 우물의 이름을 ‘브엘세바’ 라고 짓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에 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하나님’(엘 올람)이란 그 분의 이름을 부른다. 여기서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예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이런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창세기는 왜 이런 사건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여기 저기를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다. 세겜에서 그랬고, 벧엘에서 그랬으며, 헤브론에서도 그랬다. 지금은 브엘세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구약에서 브엘세바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스라엘 땅의 국경을 말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마치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한라까지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최북단 단에서 최남단 브엘세바가 이스라엘의 국경을 의미한다.
5.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땅에 대한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아브라함은 그 자손들이 거주할 땅 이곳 저곳을 다니며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의 예고이며 예언적 행위이다. 오늘 사건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비멜렉에게서 우물을 사고, 언약을 맺음으로 그곳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렇게 조금씩 하나님은 그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런 차원에서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이란 그 분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의미가 깊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분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이 하신 언약도 영원하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가운데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뛰어넘어 일하시고 역사하신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