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한 말씀 : 창세기 22:1~24
1.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은 후에 다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다. 그런데 그 사이엔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은데, 이스마엘을 낳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 이것을 두고 아브라함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설교한다. 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그렇게 유추할만한 근거는 없다. 오늘 본문도 그렇다.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은 후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오래 거주한다. 성경은 특정한 목적에 의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취사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일기장처럼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데, 그 방문의 목적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시험한다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어떤 대상이 알려진 대로 실제로 그러한지 검증하는 일”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신다.
2.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고, 그 약속의 성취로 주어진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는 방금 언급한 것처럼 약속의 자녀로 주신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제사의 방법이 인신 제사라는 것이다. 본문은 이에 대한 언급이 매우 짧다. 하지만 사람을 제사로 드리라는 명령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아마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인신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 보다는,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이 부분을 놓고 윤리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절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목적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로 순종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3.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리아 땅으로 향한다. 지리적으로도 70km가 넘는 거리이다. 오늘 본문은 삼일 길을 갔다고 말한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짧은 거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순종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간다. 아마 아브라함은 삼일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복잡한 여러 생각이 아브라함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듣고 자신의 고향을 떠나 여러 우여곡절과 오랜 기다림 끝에 아들을 낳았고, 조금씩 가나안 땅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니, 자신의 모든 소망과 기대와 지금까지 인내하며 살아온 삶이 모두 무너져 내린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걸어가서 하나님이 명하신 산에 도착하고, 최종적으론 이삭만 데리고 산에 오른다.
4. 이때 아브라함이 동행한 종들에게 던진 말과 산에 오르며 부자 사이에 오고간 대화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먼저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우리’이다. 아브라함은 곧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그냥 상투적인 표현일수도 있지만 거기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또한 산에 오르면서 나눈 부자간의 대화에도 심상치 않다. 이삭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제물이 없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아브라함의 답변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는 것이다(히브리어로 ‘라아’는 ‘보다’, ‘관찰하다’, ‘준비하다’, ‘제공하다’라는 듯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아브라함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5. 하나님이 명하신 장소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신속하게 움직인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이때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아브라함을 불렀다. 이것은 상황에 얼마나 다급하고 급박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이어지는 하늘의 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하신 목적을 명확하게 밝힌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과 믿음을 충분히 보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았더니 숫양 한 마리가 수풀에 뿔리 걸려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 연결된 모티브가 ‘본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길 원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하나님이 보신다는 의미)고 고백한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눈을 들어 보니 숫양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이때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이름을 새롭게 붙인다. 그것은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것이다.
6. 그렇다면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이런 의미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개념을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먼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길 원하신다. 성경은 그것을 시험(나사, test)이라고 부른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을 보여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보여 주신다. 우리는 이것을 ‘여호아 이레’라고 부른다. 여호와 이레는 시험에 통과한 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먼저 믿음의 순종을 보길 원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고 나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신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복을 주시겠다고, 그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말씀하신 것들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와 하나님의 말씀/약속을 신뢰하고 준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로 역사하시고 복을 베풀어 주셔서 그 약속을 성취하시고 이루어 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