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가지의 비밀
안녕하세요. 세상 속의 제자도 이상준입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5장의 본문을 같이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1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요 15:1~10, 새번역 성우 내래이션)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이 구절은 워낙 유명한 내용이라 많이들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농부로, 자신을 포도나무로, 그 예수를 믿는 우리를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하고 있죠. 그러면서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 버리고,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태운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는, 새번역으로 보면 제일 많이 반복되는 표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머물다’는 동사입니다. 헬라어로 ‘메노’(meno/μένω)인데, 그 의미는 ‘머물다, 유지하다, 남다’입니다. 오늘 본문을 직접 보면서 한번 확인해 볼까요?
자! 4절을 보면, 세 번 사용되고 있죠.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5절에는 한 번 사용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성경에는 두 번 사용된 것처럼 보이는데 헬라어로 보면 한 번만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6절에도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7절에는 5절과 다르게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9절에는 한 번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마지막 10절에서는 다시 두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두 번째로는, ‘머물다’와 연결되어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마치 원인과 결과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물러 있으면 혹은 붙어 있으면 이렇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죠. 그렇다면 여기 네모칸에 들어갈 단어가 뭘까요? 맞습니다! 열매입니다. 헬라어로는 ‘카르포스’(furit/καρπός) 입니다. 나무에 열리는 열매를 의미하는 단어죠. 이것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해 볼까요?
먼저 2절을 보면 세 번 등장합니다. 이어서 4절엔 헬라어로 보면 한 번 등장하는데 우리나라 성경에는 두 번 등장합니다. 5절에도 한 번, 마지막 8절에도 한 번 등장합니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가지는 포도나무에 머물러 있어야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죠. 예수님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기에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렇다면 ‘머문다’는 것은 무엇이며, 예수님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특히 열매라고 하니 많은 분들이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아홉가지 성령의 열매’라고 해석을 합니다. 왜냐하면 ‘카르포스’라는 같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조하고 있는 열매는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요한복음 5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은 예수님이 명절에 그 유명한 베데스다 연못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1~15절). 근데 이 사건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논란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필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16절).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반박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이어서 19절과 20절에서는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셔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첫째,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둘째, 그러므로 아들도 일한다. 셋째,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와 독립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렇다면 아들이 일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가장 먼저 아버지가 지금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요한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이 이 원칙 혹은 이 관계를 계속해서 강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몇 개의 증거 구절을 찾아볼 것인데, 하나님(아버지)의 일, 하나님(아버지)의 뜻, 혹은 내 뜻, 행한다 라는 단어들을 주목하면서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5장 3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그것은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복음 6장 28절과 29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이어서 3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7장으로 넘어가면 재미있는 구절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3절을 보면, 초막절이 가까와지자 예수님의 형제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이 구절에서 눈여겨 봐야할 단어가 ‘형님이 하는 일’입니다. 이 단어는 정확하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일’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행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을 행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더불어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가르침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은 겉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행위와 말에 문제 제기를 하고 있고,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행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8장 16절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심판하면 내 심판은 참되다. 그것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8장 38절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요한복음 10장 32절에서는 자신을 돌로 치려고 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권능을 힘입어서, 선한 일을 많이 하여 너희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어떤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일을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아버지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해가 되시죠! 그 증거구절이 37절과 38절입니다. 이 구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아라.
38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을 거꾸로 읽으면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그 관계를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가 행하시는 일을 보고, 아버지의 일을 아들도 행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겉으로 보이는 인간 예수를 믿을 수 없다할지라도, 그가 행하는 일을 보면 그 일이 아버지가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아버지의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내용과 다시 연결해 보면, 이런 기적과 가르침이 모두 아버지의 일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나사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언급되고, 12장으로 넘어가면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예수님은 이런 여인의 행위를 자신의 장례 곧 죽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은 급격하게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그 출발점이 예루살렘 입성입니다(요 12:12). 예수님은 입성 이후 “인자가 영광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며 본격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행동이 모두 아버지의 뜻이고 아버지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 13장으로 넘어가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과 함께 그들이 예수님을 배신 것을 예고하시고, 14장부터는 긴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도가 17장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말씀이 14장에 있습니다. 오늘 나누려고 하는 이야기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14장 12절부터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14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잘 믿지 못하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13절과 14절은 기도응답에 대한 약속으로도 유명하죠. 앞뒤 문맥 다 떼어버리고 이 구절만 가지고 마치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응답해 주신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에서 나눈 이야기와 연결해서 방금 읽은 이 구절들을 다시 읽으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란 것은 곧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아버지의 일이라고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12절의 의미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능력보다 더 많은 기적과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문제는 이 땅에 남아 있을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자신이 행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그들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의미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면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하신 것처럼, 이 땅에 남은 제자들도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이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할 때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제가 앞에서 길게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원칙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강조하신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표현을 오해하진 마세요. 예수님이 진짜 무능력 하셔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이구요. 이 표현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자신의 지헤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권위를 강조하는 예수님의 고백인거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거하면서 아버지가 행하시는 일을 보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과 예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분이 행하시는 그 일에 순종하며 동참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일이 드러나고 나타납니다. 바로 12절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3절과 14절에 약속한 기도 응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도 앞에서 살펴본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면서 아버지가 행하시는 일을 살펴보셨고, 그 아버지의 일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나의 소원과 욕심을 투영하는 도구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가 행하시는 일을 발견하셨고, 그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심으로서 기도의 응답, 곧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이 땅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것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이 응답 받을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그것을 위해 간구할 때 우리를 통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이 드러남으로, 곧 예수님의 뜻을 위해 간구한 기도가 응답 받음으로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더 이상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는데,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곁으로 가버리셨는데,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14장 16절과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안에 놀라운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17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 바로 승천하신 예수님이 보내주실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님을 통해서 그런 삶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으며, 반대로 예수님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안에,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비유로 정리한 것이 서두에 읽었던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하늘 아버지가 포도나무이시고, 이 땅에 오신 아들 예수님이 포도나무 가지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가지로서 사셨습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열매를 맺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포도나무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관계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지적인 동의, 어떤 정보와 지식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철저한 신뢰의 관계 안에서 가지로서 사는 삶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지이신 예수님이 맺으신 열매는 무엇일까요? 예! 바로 ‘아버지의 일’입니다. 정리가 되시나요?
요한복음 15장은 이것을 확대해서 다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아버지가 농부이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그 포도나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가지입니다. 가지의 유일한 존재 목적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그 분의 뜻과 그 분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따라하는 것,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5장은 그것을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삶은 기도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란 나의 욕망을 투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뜻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지인 우리의 삶에 많은 열매들이 맺혀질 것입니다.
오늘은 영상이 길었는데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포도나무 가지로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구요. 감사합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