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큐티의 정의
먼저 큐티(Q.T)란 ‘Quiet-Time’의 약자로 직역하면 ‘조용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큐티란 정확히 무엇을 하는 시간일까요? 간단한 정의를 내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용한 시간(가급적이면 아침시간)에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알아가고 배워가는 시간일 뿐 아니라,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각 사람에게 형편과 처지를 따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그 분의 계획과 소망, 비전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먼저 ‘정의'(혹은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에 나온 큐티의 정의를 다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1) 조용한 시간, (2) 하나님의 동행하심, (3) 말씀과 기도, (4)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결과를 기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며, 둘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니 여기서는 큐티의 정의를 머리 속에 잘 넣어두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간단한 예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고 살펴보길 원합니다. 가장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누가복음 5:15~16과 마가복음 1:35을 차례대로 읽고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5그러나 예수의 소문이 더욱더 퍼지니, 큰 무리가 그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모여들었다. 16그러나 예수께서는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 (눅 5:15~16)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막 1:35)
삶과 사역의 우선순위
먼저 누가복음 5장의 말씀을 보면, 바로 앞에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치시는 이야기(5:12~14)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주변 사람들에게 퍼지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피하시고 오히려 사람이 없는 외딴 곳으로 물러나십니다.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몰려온 사람들이 두 가지 목적을 있었는데, 예수님께 말씀도 듣고, 자기들의 병도 고침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핵심 사역(가르침과 병고침)에 해당됩니다. 마가복음 1:38을 보면 “가까운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라고 자신의 사명이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라고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받기 위해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하셨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적으로 봤을 때도 자신에게 몰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뿌리치고 외딴 곳으로 간다는 것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갑자기 ‘스타'(star)가 된 것입니다. 갈릴리 지역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그 결과로 여기 저기에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대세남’ 혹은 ‘인싸’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인기에 흔들리거나 현혹 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피해서 외딴 곳(조용한 곳)으로 가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우선순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역(일)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갖는 교제의 시간(조용한 시간)이었습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사진이 맘에 듭니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사진들을 너무 경건하게만 묘사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외딴 곳에서 어떻게 조용한 시간을 보냈을까요?
마가복음 1:35을 보면 이런 예수님의 행동이 습관적으로 반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그것을 쉽게 발견할 수 없지만, 원어나 영어로 보면 이른 새벽에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는 것이 습관적인 행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꾸준히, 반복적으로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시간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쁜 사역(일)이나 스케줄 때문에 뒤로 밀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역(일)을 멈추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 말고 다른 예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윗에게서 그 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 5:3과 143:8을 차례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 (시 5:3)
“내가 주님을 의지하니, 아침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말씀을 듣게 해주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께 의지하니,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시오.” (시 143:8)
두 시편 모두 제목에 ‘다윗의 노래’라는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두 시편 모두 다윗이 하나님께 고백하고 노래로 불렀던 가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개념을 가진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벽’이란 단어와 ‘기도’와 ‘아뢰다’, ‘의지한다’, ‘주님의 뜻을 기다린다’, ‘사랑의 말씀을 듣게 해 달라’,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달라’ 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1) 다윗은 새벽(조용한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2) 그 기도는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3) 하지만 단순히 아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4) 이것은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5)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시길 의뢰하는 것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큐티(Q.T)의 중요한 개념들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벽이라는 조용한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상황과 처지와 마음의 상태를 고백하고 아뢰는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지하는 시간을 다윗이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침묵으로 그 시간을 보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환경의 방해를 받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큐티의 목적
그럼 큐티를 하는 정확한 목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데, (1)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2)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3)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4) 하나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먼저 고린도전서 1:9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 (고전 1:9)
이 말씀을 보면 우리의 부르심(calling)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주(LORD)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친교와 협동, 공유와 관계, 사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 속에서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목적의 첫 번째는 어떤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교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너무 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거나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부르심의 첫 번째입니까?
“23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24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요한 것은, 그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호 4:6). 왜나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기초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형성되어집니다. 우리는 과거 이것이 지식적인 학습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런 지적인 학습 과정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about) 지식을 많이 습득한다고 저절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과 함께 인격적인 경험과 만남이 어우러져야 가능합니다.
나중에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점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하고 사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경험되어질 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 안에 형성되어집니다. 그것을 돕는 것이 큐티입니다. 조용한 시간에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짐으로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훈련하는 것이 큐티의 진정한 목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마치 밥은 먹지 않고 반찬만 먹는 것과 똑같습니다. 다시 한번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닮기 위해
두 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닮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갈 때 우리 삶과 성품(인격)과 관계 안에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통해 그 분을 알아가는 것이 나무의 뿌리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5:16~23).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갈 때 맺혀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16, 18).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그것은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의 영'(요 16:13) 곧 진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말씀을 통해 인도하심을 받고, 다스리심을 받으며,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하여
큐티를 하는 세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함’ 입니다. 먼저 시편 119:105과 119:133을 읽겠습니다.
105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133내 걸음걸이를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떠한 불의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먼저 119:105을 보면, 시인은 주님의 말씀이 자신의 발의 등불(lamp)이며, 자신의 길의 빛(light)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등불이라고 하는 것은 집 안에서 사용하는 등잔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가까운 주변이나 집 안을 밝혀주며, 발 밑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발’은 순간순간 선택하고 결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일상을 의미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 단위는 ‘하루‘(daily)입니다. 우리는 ‘주간'(week) 단위나 ‘월간'(monthly) 단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 단위로 삽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을 때 매일 아침에 그 만나를 거두도록 하셨기 때문이며, 그 만나를 주신 목적은 단순히 육체적인 배고픔만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훈련 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신 8:2~5 참조).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순간, 일상이라는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시인은 이것을 ‘발의 등불’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은 자신의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삶의 방식이나 스타일을 의미하는데, 구약성경에서는 이것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 분의 율법을 따라 사는 삶, 주님의 계명들이 가리키고 제시하는 길을 걸어가는 삶을 의미합니다(119:35).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이 그런 길을 제시할 뿐 아니라, 그 길을 비추어 주는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여기서 빛을 먼 곳에 있는 목적물을 찾아내거나 밝히는 ‘서치라이트’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낮을 주관하는 빛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주변 모든 세상을 밝게 비추는 강력한 빛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시인이 걸어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반대로 어떤 삶을 살면 안 되는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싫어하는 삶은 어떤 것인지, 거룩한 삶은 무엇이며, 교만하고 패역한 삶은 어떤 것인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물론 여기에 어떤 비전이나 목표가 포함될 수 있지만, 단순히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생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길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일(사역)을 준비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앞에서 살펴본 누가복음 5:15~16과 마가복음 1:35을 읽겠습니다.
“15그러나 예수의 소문이 더욱더 퍼지니, 큰 무리가 그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모여들었다. 16그러나 예수께서는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 (눅 5:15~16)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막 1:35)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일(구원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일(work)의 주체(주어)는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것을 ‘주최’와 ‘주관’이란 용어로 설명하기를 좋아합니다. 보통 ‘주최’라고 하면 어떤 일이나 행사에 대하여 계획하거나 최종 결정을 하여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하고, ‘주관’이란 그 일이나 행사를 도맡아서 진행하는 기관이나 단체를 의미합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하나님은 주최하시는 분이시고, 예수님은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모든 계획과 뜻은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진행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발견하고, 그 뜻에 자신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 하셔서 참여하시고 순종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그것을 듣고 보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기도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기도의 시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듣는 시간이며, 그 분의 뜻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해 드리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일(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침마다 갖는 큐티(Q.T)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부르셔서 시키시는 일(사역)을 준비하고 깨닫고 발견하며, 궁극적으로는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매일 친밀하게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을 훈련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분의 일에 동참하게 되고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확보하시고,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